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제분 공장을 경영하던 앙리 뒤낭. 토지와 물 사용 허가권을 얻기 위해 식민지 당국을 찾아간 그는 본국인 프랑스의 허락을 받아오라는 답변을 받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는 이탈리아 독립전쟁에 참전 중이었습니다. 결국, 앙리 뒤낭은 황제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지역을 가기로 다소 무모한 결정을 내립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사르데냐 공화국을 중심으로 반도를 통일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북부 지역을 지배하던 오스트리아 제국을 몰아내야만 했죠.
이것이 바로 이탈리아 독립전쟁입니다. 이후 오스트리아와 경쟁 관계였던 프랑스가 이 전쟁에 참전하면서 사르데냐 공화국과 연합국을 이뤘고, 오스트리아는 점점 동쪽 지역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그러던 1859년 6월 24일, 솔페리노 지역에서 양 측간에 무력 충돌이 발생합니다. 단 하루 만에 4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할 정도의 처절한 전투였습니다.
뒤낭은 전투가 벌어진 다음 날인 6월 25일, 솔페리노 인근 카스틸리오네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엄청난 사상자가 물밀듯이 밀려온 참혹한 현장을 목격한 그는 사업 목적을 잊고 구호 활동에 전념합니다. 사비를 들여 인근 마을에서 식료품을 구해왔고, 마을 여성들과 힘을 합쳐 봉사대를 조직했으며, 국적에 상관없이 전상자들을 성심성의껏 돌보았습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이동하는 데만도 시간이 꽤 걸렸다.
이 상황에서 나는 자문할 수밖에 없었다.
“왼쪽에서는 한마디 다정한 말이나 위로의 말도 듣지 못하고 타는 목을 축일 물 한 그릇조차 마시지 못한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 어째서 나는 오른쪽으로 가야 하는가?”
괴로움을 느낄 때면, 한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는 도덕심과 부상자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고자 했던 인간적인 희망이 용기를 북돋아 주곤 했다.
‘그래, 이런 상황일수록 누군가는 행동에 옮겨야 해.’
덕분에 자원봉사를 계속 이어서 할 수 있었다.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 진실한 열망은 카스틸리오네의 부녀자들에게도 숭고한 힘을 가져다주었다.
[솔페리노의 회상] 中 | 앙리 뒤낭 | 주니어김영사
전쟁의 참상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로 결심한 뒤낭은 사료를 조사하고, 참전 용사들을 인터뷰한 끝에 1862년, [솔페리노의 회상]을 발간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 책에서 두 가지를 제안합니다.
첫째, 전쟁이 날 것을 대비해 평상시에 훈련된 자원봉사원으로 구성된 단체를 만들 것. 둘째, 국가 간의 조약을 통해 구호 단체의 활동을 보장할 것. 그의 첫 번째 제안은 1863년 근대 최초의 인도주의 기관인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설립으로 이어졌으며 두 번째 제안은 1864년 최초의 제네바협약 체결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국제적십자운동의 탄생으로 근대 인도주의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16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에는 192개국에 적십자사 및 적신월사가 있고, 196개국이 제네바협약에 가입하는 등 세계 최대 인도주의 네트워크로 성장했습니다.
근대 인도주의는 한 사람의 탁월한 열정, 비전,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또한 ‘우리 모두는 형제다’를 외치며 성심성의껏 전상자들을 돌본 카스틸리오네 마을 여성들, 의료인, 기부자, 그리고 제네바협약이 탄생하기까지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있었기에 인류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인류애(Humanity)는 어디로 갔는가?”
이는 뒤낭이 죽기 전에 남긴 말이라고 합니다. 평생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그가 죽고나서 얼마 뒤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약 160년 전 뒤낭과 수많은 조력자의 노력이 있었기에 전쟁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듯이 우리의 미래가 상생(相生)의 길로 갈 것인지 공멸(共滅)의 길을 갈 것인지는 전적으로 인간에게 달려있습니다. 인도주의(Humanitarianism)라는 위대한 유산을 끝까지 지켜내고 유지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