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이란 집단의 공동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구성원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해내는 지도자의 능력 정도로 이해됩니다. 이런 능력을 발휘하려면 어떤 자질이 필요할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답이 보입니다. 우선 머리가 좋고 지식이 풍부해야 합니다. 체력적으로 강건하고 남 앞에 솔선수범하고 희생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합니다. 미래를 보는 안목으로 확고한 비전을 제시할 능력도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탁월한 카리스마적 기질이 더해지면 역사상 위대한 지도자의 반열에도 오르게 됩니다.
근대 이전에는 신과 소통할 수 있다는 주술적 능력이 리더십의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그러나 근대 이후, 신에 대항한 인간의 주체적 자아가 형성되면서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특별한 리더십보다는 엘리트 대중과 교감하는 합리적 지도력이 중요해졌습니다. 근대 유럽인들은 수학과 과학적 지성을 앞세워 자신의 존엄성을 찾아갔습니다. 당시 지식인들은 인간이 신과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이유를 인간 이성(理性)에서 찾은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수학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과 동의어이며 서양의 이성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발원한 기하학이 그 뿌리입니다. 경작지의 면적을 측량하던 땅의 기하학은 이집트를 거쳐 그리스에서 한 차원 높은 추상적 고등수학으로 발전합니다. 합리와 추상적 논리를 중요한 가치로 여겼던 당시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거의 모두가 지독한 기하학 마니아들입니다.
BC 6세기 피타고라스는 이 고등수학을 기반으로, 세상을 수로 설명하는 수리적 세계관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서양의 수리적 전통이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꽃을 피운 후 서양철학 2천 년을 지배하는 이성적 사고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근대 유럽인들이 신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이후 가장 먼저 한 공부가 그리스의 수학이었습니다. 인간은 수학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자연계의 어떤 종과도 차별되는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신으로부터 독립할 충분한 자격이 있고 신만큼 존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은 프랑스대혁명의 볼테르나 루소의 사상으로 집약돼 꽃을 피웠습니다. 또 토마스 제퍼슨 등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또한 이런 사상적 기반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간존엄성을 보장하는 민주국가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한편, 서양의 합리적 인문주의는 그 한계 또한 명백했습니다. 인간이 수학적 사유 능력을 가진 존재라서 존귀한 것이라면 수학 교육의 세례를 받지 못한 인간은 어떤가요? 교육받지 못한 대다수 평민과 노예, 여성 그리고 아프리카의 흑인, 봉건사회의 압제에 신음하던 동시대 아시아인들의 존엄성은 어찌할 것인지요? 백인 엘리트들의 근대 인문주의 리더십은 과학적 지식을 무기로 자연을 철저히 수탈하고 환경을 파괴했습니다. 유색인종 등 여타 인류에 대해 반인륜적 억압과 착취도 일상화했으니, 근대의 수학적 리더십은 세계 1·2차 대전으로 귀결되면서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인류를 최악의 불행에 빠뜨린 근대의 합리주의 리더십!
근대 인문주의적 사고는 인간이 이성이라는 특별한 능력 때문에 존엄하다고 생각한 반면, 적십자는 ‘인간은 인간 그 자체로 존엄하다’는 인류역사상 최초의 획기적인 사상적 성취를 이룩해냈습니다. 그래서 적십자 인도주의 정신은 호모사피엔스 20만 년의 진화가 빚어낸 가장 빛나고 숭고한 결실입니다. 인간은 물론이거니와 지구상의 모든 생물 그리고 지구 그 자체도 존엄하다는 적십자 인도주의 정신이야말로 인류가 나아가야 할 보편타당한 미래의 모습입니다. 갈등과 착취와 살육에 익숙했던 칠흑 같은 인류사에 한 가닥 환한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현시대의 인류는, 비록 근대 합리주의가 인간을 소외시키고 전 지구적 환경문제 등의 부작용을 낳았지만, 과학을 떠나서는 존립이 어렵습니다. 우리는 수학과 과학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주의가 잉태한 재앙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느냐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있습니다. 새로운 문명사적 패러다임의 전환이 절실한 이유입니다.
이 시대적 사명을 완수할 사상적 힘은 보편적 인류애가 그 근간인 적십자 인도주의 정신이고 그들이 보여주는 인도주의 리더십입니다. 자연과 그 안에 사는 모든 생물종 그리고 인간은 모두 같은 값으로 존엄하다는 적십자 인도주의 정신이야말로 참으로 위대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