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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번째 이야기 황티반안 씨 가족
일찍 찾아온
천사들의 얼굴에서
새 희망을 그려봅니다28주 3일 만에 찾아온 쌍둥이를 안아볼 수도 없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7개월이 지났습니다. 너무 작고 연약한 두 아기의 엄마로서 강하고 씩씩하게 살아가야 할 텐데 불법체류자 신분을 물려준 것 외엔 아무것도 주지 못 하는 것만 같아 마음이 아파요. 이름조차 지어주지 못한 제 아기들에게도 희망이라는 선물을 줄 수 있을까요?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며느리, 불법체류자가 되다
인큐베이터에서 생을 이어간 아기의 모습2013년, 저는 베트남에서 한국인 남성을 만나 교제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저보다 10살 이상 나이가 많았던 남편은 배려심이 깊고 믿음직스러웠지요.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결혼하여 조국을 떠나 생활한다는 게 두렵기도 했지만 듬직한 남편과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마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그러나 경기도 용인에서 시작한 결혼 생활은 제 기대와 달리 오래가지 못 했어요. 시어머니를 비롯하여 시아주버니 부부와 조카들까지 함께 대가족을 이루며 좁은 집에서 살았는데요. 집안 살림과 바깥일을 병행하느라 잠을 제대로 자기는커녕 밥도 제때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낮에는 가구 경첩을 만드는 공장에서 정신없이 일하고 밤에는 낮에 못 한 집안일을 하느라 바빴거든요. 공장일을 그만두고 싶기도 했지만 월 130만 원의 수입으로 대부분의 생활비를 충당해야 했고 그중 일부는 다리가 불편하신 친정어머니께 송금해드려야 해서 그럴 수가 없었지요. 항상 잠이 부족하고 끼니를 거르니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밝았던 제 얼굴엔 차츰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가족들도 그 모습이 보기 싫었는지 다툼이 잦아졌고 결국 저는 이혼을 하게 되었어요. 한 가정의 생계를 꾸려나가던 억척 며느리에서 한순간에 불법체류자로 전락한 것입니다.
28주 만에 만난 세상에서 가장 작은 천사들
생후 7개월이 되었지만 쌍둥이는 몸을 뒤집지도, 기지도 못한다남편은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인천시 계양구 작전동에 저를 내려주고는 그길로 가버렸습니다. 불법체류자로 신분이 바뀐 저는 여기저기 전전하며 숨어 지내야 했어요. 언어 장벽에 부딪히다 보니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할 수도 없었지요. 동네에서 알음알음 인연을 맺은 베트남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화장 솜 만드는 부업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던 중 저는 제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병원에서 쌍둥이 임신임을 확인하고 주변에 알리니 ‘홀몸으로 하나도 아니고 둘을 어떻게 키울 거냐’며 축하보다는 걱정을 했지만 오히려 저는 기뻤어요. 선물 같은 아기가 한 번에 둘이나 와줬다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쌍둥이를 지키기 위해 밤낮 가리지 않고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무리했던 탓일까요? 임신 25주차가 지나면서부터 몸이 많이 안 좋아졌고 배가 자주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와 배가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가까스로 동네 산부인과에 갔더니 지체할 것 없이 대학병원에 가보라며 구급차를 불러주셨고 새벽에 도착한 대학병원에서는 산모와 아기 모두 위험하다며 긴급 제왕수술을 제안하셨습니다. 저는 오직 아기들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수술에 동의했어요. 그렇게 28주 3일 만에 1.28kg, 1.37kg의 세상에서 가장 작은 두 천사와 만났습니다.
28주 만에 만난 세상에서 가장 작은 천사들
적십자봉사원 품에 안긴 아기출산의 기쁨도 잠시, 병원비가 없어서 제왕절개 수술 후 이틀 만에 퇴원한 저는 산후조리를 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자가호흡이 어려울 정도로 작게 태어난 쌍둥이는 곧바로 신생아 중환자실에 들어갔고 하루 두 번, 30분씩이라도 만나기 위해 저는 병원에서 살다시피 해야 했거든요. 엄마 젖 한 번 제대로 물지 못 한 아기들이 기계의 힘으로 호흡을 이어가는 그 모습을 보며 참 많이 울었습니다. 게다가 신분의 한계로 건강보험 적용을 받지 못 한 저에게 쌍둥이의 병원비 내역서는 그야말로 폭탄과 같았습니다. 일주일 만에 쌓인 병원비가 무려 1,600만 원. 아기들이 스스로 숨 쉴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을 갖기 위해 두 달 정도 인큐베이터 생활을 해야 했고 추산 금액은 2억 원에 달했습니다.
만약 아기들이 인큐베이터를 나오게 된다면 그대로 사망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의 생명과 높은 현실의 벽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그때, 저는 기적과도 같이 구세주를 만났습니다. 병원에서 연결해주신 대한적십자사에서 불법체류자라는 신분을 초월하여 사람을 살리는 마음으로 저를 위한 모금운동을 해주신 겁니다. 따뜻한 마음을 돈으로 전해주시는 것도 모자라 응원 댓글까지 남겨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한국어 읽기가 능숙한 베트남 친구의 도움을 받아 댓글 하나하나 확인할 수 있었고 휴대전화 화면을 캡처하여 지금도 가끔 들여다본답니다.
반지하 단칸방에서 쌍둥이와 함께 그려보는 희망
황티반안 씨를 위로하는 적십자봉사원병원 측의 배려와 대한적십자사의 도움으로 아기들은 40여 일의 인큐베이터 생활을 끝내고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덧 7개월에 접어든 쌍둥이는 잘 먹고 잘 잔 덕분에 금세 살이 오르더니 벌써 8kg이 넘었어요. 엄마 힘든 걸 아는지 아기들이 참 순하고 예뻐서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고 힘이 생깁니다. 그러나 현실이 힘든 건 어쩔 수가 없네요. 사정이 딱하다며 주변 베트남 친구들이 돈을 모아서 주기도 하지만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질 않습니다. 아기들 돌보느라 어디 나가서 일할 수 없는 탓에 컴퓨터 부품 조립 부업을 하고 있는데 꼬박 밤을 지새우며 한 달 열심히 일해도 손에 쥐어지는 돈은 고작 20~30만 원. 월세 15만 원을 내고 남는 돈으로 아기 기저귀와 분윳값을 대려니 버겁기만 합니다. 신분의 한계로 아기들의 예방접종은 고사하고 아플 때 병원 한 번 갈 수 없는 상황은 무섭기까지 해요. 그래서 매일 아침 아기들의 이마를 짚어보고 손발을 살펴보며 아픈 덴 없는지 확인하는 게 저에겐 아주 큰일이랍니다.
어두컴컴한 반지하 단칸방은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외풍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따뜻한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어 큰맘 먹고 텐트를 하나 산 저는 그 안에 쌍둥이를 나란히 눕히며 눈물을 삼켰지요. 아직 이름도 지어줄 수 없는 형편이지만 오동통 살이 올라 저를 보며 방실방실 웃는 아기들을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다짐했습니다. 저와 아기들을 위해 마음을 모아주신 분들과 대한적십자사에 보답하는 그 날까지 절대 울지 않을 거예요. 의료 기술이 부족한 베트남이었다면 세상 빛을 보지 못 했을 아기들에게도 한국에서 받은 큰 도움을 계속 이야기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잘 살아보자는 눈빛을 전해봅니다. 엄마의 눈빛에 미소로 화답하는 아기들의 얼굴에서 희망을 보고 나아가겠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 RC LOVE 위기가정 지원 희망풍차 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