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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RCY함께하는 RCY
너와 나누고픈 우리의 이야기! RCY mate Report RCY mate 기자단 Report대구동산병원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한 것은 입대를 두 달 앞둔 3월 18일이었어. SNS에서 대구지역에 도움의 손길이 절실하다는 얘기를 접했는데 RCY 단원으로서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지. 자원봉사자 모집 글을 교내 커뮤니티와 각종 SNS에 퍼 날랐는데 반응이 신통치 않았고 친구들도 대부분 난색을 표했어. 언제, 어떤 경로로 코로나19에 감염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위험을 무릅쓰기에는 아무래도 무모한 감이 없지 않아 보였을 거야.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누군가 하겠지 하는 생각도 있었을 거고.
하지만 두고 볼 수만은 없었어. 확진자가 급격하게 늘고 있는 상황에서 의료진과 지원 인력은 턱없이 부족해 보였거든. 보다 많은 사람이 동참하게끔 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 ‘일단 나부터 시작하자. 내가 먼저 자원봉사를 하면서 안전하다는 걸 증명해 보이면 되지.’ 이런 결론에 이르자 입대를 앞둔 시점에 친구들을 만나고 여행을 다녀오기로 한 계획을 모두 접을 수밖에 없었지. 어차피 코로나19로 그 모든 것이 꿈같은 이야기가 된 터였어. 봉사를 하기로 마음먹었지만 부모님을 설득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는데, 아버지는 안전을 염려하셨지만 다행히 내생각에 동조해주셨단다.
“안전한 거 맞나? 우정이고 돈이고 그 이상을 얻을 수 있는 거면 됐다. 한번 해봐라.”
처음 병원에 갔을 때 나 외에 자원봉사자가 네다섯 명 정도 더 있었고 대부분 나이가 연로하신 분들이었어. 진료 시설을 확충하기 위해 무거운 가구나 짐을 옮길 일이 많았는데 그분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지. 한 번은 4층에서 2층으로 침대를 옮긴 적이 있었어. 침대를 옮기기 전에 이미 5톤 트럭 분량의 짐을 나르느라 진이 다빠진 상태였거든. 너무 무거워서 놓칠 뻔한, 아찔한 순간도 여러 번 있었는데, 마지막 순간까지도 애를 먹었어. 문 크기에 비해 침대가 너무 큰 탓에 아무리 애를 써도 병실 안에 들일 수 없었던 거야. 결국 침대 프레임을 전부 분리해 방안으로 들인 뒤 재조립해야 했지. 온몸에 골병이 들 만큼 힘든 날이었단다. 하지만 봉사에 참여한 걸 후회해 본 적은 없었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뿐이니까.
처음으로 자원봉사를 했던 때가 떠올라. 중학교 1학년 때 요양원에 봉사를 간 적이 있었는데 혼자서는 제대로 식사도 거동도 하지 못하는 노인 분들을 보면서 착잡함과 안타까움을 느꼈어. 남을 위해 내가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던 것 같아. 고등학교 3학년 때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저소득층 아이들을 대상으로 영어학습을 도왔고 헌혈도 자주 했어. 대학생이 되어 대한적십자사에 가입한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지. 그전까지는 RCY의 구호활동과 봉사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깊이 고민할 여유도 없었거든. 대학교에 RCY가 있다는 걸 알게 되자 고민할 것도 없이 입단했어. 좋은 뜻을 가진 사람들과 봉사활동을 함께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나 싶었거든. 이전에도 봉사하는 걸 좋아하긴 했지만 대학RCY 활동을 하면서 비로소 나의 무대가 넓어지고 세상을 보는 시각이 트였다고 느끼게 됐지.
나는 봉사하는 동안 의료진과 각별하게 지냈어. 그분들은 나를 친한 동생처럼, 때론 아들처럼 따뜻하게 대해 주셨거든. 휴무일이라 쉬고 있으면 “영훈 씨, 어디 있어? 통 안 보이네?” 하며 나를 찾는 분들이 계셨어. 그럴 때면 ‘나는 이 병원에 필요한 사람이구나’, ‘이곳에 내가 없으면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유대감과 책임감을 느끼곤 했지. 봉사에 동참하는 학생들도 점차 늘었어. 내가 봉사하러 간다고 할때만 하더라도 농담 삼아 앞으로 만나지 말자고 하던 친구들도 이제는 이해하고 받아들였지. 간혹 굳이 네가 나서서 그 위험한 일을 할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었어. 봉사는 내가 가진 시간과 돈을 희생함으로써 나를 소모하는 행위가 아니라 나를 비워냄으로써 또 다른 무언가로 채우는 행위라고 생각해. 그것이 나눔과 연대가 가진 힘이지. 그런 마음가짐으로 모인 사람들의 힘으로 우리 사회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리라 믿어.
간호장교로서 내가 가야 할 길 국군수도병원 간호장교 이해인 소위처음 국군대구병원으로 발령을 받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걱정이 됐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교육받은 대로 방호복과 방호장구를 철저히 갖추고 감염 예방관리에 주의를 기울이면 감염 가능성은 최소화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크게 두렵거나 하진 않았어. 그보다는 3월에 간호장교로 임관한 뒤 간호 실무 경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대구로 내려가게 된 터라 환자들을 제대로 돌볼 수는 있을지, 함께 일하는 의료진과 근무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걱정이 더 많았단다.
대구병원에서 근무하는 동안 입원 환자들을 지정된 격리루트로 안내하는 안내요원 업무부터 병동에 배치돼 환자를 돌보는 병동간호 업무, 그리고 투약간호, 환경관리, 활력 징후 측정, 영양 간호 등을 맡았어. 간호 실무가 처음이다 보니 초반에는 실수도 많았지. 그럴 때마다 먼저 파견 오신 간호장교님이 친절하고 세심하게 하나하나 가르쳐주셔서 잘 적응할 수 있었어. 실수를 하면 무엇이 잘못됐는지, 어떻게 보완하면 좋을지 세세하게 알려주셨기에 도움이 많이 되었단다. 무엇보다 힘이 되고 의지가 됐던 건 함께 임관하여 국군대구병원에서 첫 업무를 보게 된 간호사관학교 60기 동기들이었어. 사관학교에서 4년간 함께하며 끈끈해질 대로 끈끈해진 팀워크는 현장에서도 빛을 발했지. 방호복과 방호장구 차림을 하고서도 우리는 몸짓만으로 상대방이 뭘 원하는지 알 수 있었거든. 격리병동 생활에서는 아무래도 제약이 많다 보니 힘들어하는 환자들이 많았어. 병원에 있는 동안 나름의 원칙으로 생각했던 점은 무슨 일이든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는 것이었는데 나로선 감염을 겪어보지도, 음압격리병동에서 입원생활을 경험해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환자분들이 느끼는 감정과 생각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어려웠단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환자의 입장을 최대한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그분들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불편한 점은 무엇인지 자주 여쭤보았지.
힘든 일이 많았지만 좋은 일도 많았던 시간. 몇몇 환자분은 퇴원하면서 의료진에게 손수 편지를 써서 남겨주기도 했어. 택배와 함께 보내주신 편지부터 “편지지가 없어 이렇게라도 몇 자 남깁니다”라며 빼곡하게 감사의 말로 채워주신 메모지, “그동안 간호해주시고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남겨주신 문자 메시지까지 하나같이 감동적이었지. 또 의료진을 위해 시민들이 보내주신 구호품과 선물, 응원 덕에 매일 행복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일할 수 있었어.
나는 비교적 어린 시절부터 남을 돕는 일과 봉사에 관심이 많았는데 영화 <연평해전> 속 박동혁 의무병의 헌신을 보며 내가 가야 할 길을 확신했단다. 국군간호사관학교 입학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RCY 활동을 접했고 상급생으로 갈수록 학년을 대표해 대외적인 활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3학년 때는 RCY 학년 대표를, 4학년 땐 대전·세종지사 RCY 협의회 회장을 맡아 뜻깊은 활동을 많이 했어. 그만큼 RCY 활동은 간호사관학교 시절 내내 큰 활력소였지.
코로나19라는 재난을 겪게 된 것은 불행한 일이지만 한편으로 학창시절부터 꿈꿨던 간호장교가 되어 국가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는 점에서 기뻤어. 비록 부족한 점은 많았지만 매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자 했지. 함께 파견된 간호사관학교 동기뿐 아니라 선배 간호장교님들, 그리고 코로나19 이전에도 메르스 사태와 같은 국가재난상황에 파견된 많은 간호장교님들이 어려운 상황에 함께 있었다는 걸 많은 분이 기억해주셨으면 해.
그동안 어려운 재난상황에서 따뜻한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신 많은 시민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앞으로도 간호장교로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할 것을 약속드리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