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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한 전투가 벌어진 서부 전선의 심연 속으로
배동미의 시네마 토크
최근 열린 제95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편의 독일어 영화가 주목받았습니다. 바로 에드워드 버거 감독의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입니다. 작가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가 제1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뒤 쓴 소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현대적인 기술로 영화화한 작품인데요. 오래된 서사인 이 영화가 어떻게 현대 관객과 평론가에게 울림을 줄 수 있었는지 살펴봤습니다.
- 글 배동미(씨네21 기자)
‘전쟁영웅·명예는 없다’ 참상을 목도하는 관객
영화는 죽음의 이미지에서 시작합니다. 군복을 입고 널브러진 시체들, 움푹 패여 검붉은 핏물이 고인 웅덩이, 수많은 발자국이 찍힌 진창, 시체 위에 고요하게 내려앉은 새하얀 눈. 독일과 프랑스가 대치 중인 이곳은 독일 영토를 기준으로 서쪽에 해당해 독일군에 의해 ‘서부 전선’이라 불렀습니다. 1차 세계대전 중 서부 전선은 참호전(땅을 파서 도랑을 만들어 버티는 양상)으로 굳어졌는데 종전 무렵 이 전선은 사실상 거의 이동이 없었다고 합니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라는 제목은 전쟁의 무의미를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고작 몇백 미터의 땅을 차지하려고 벌어진 전투에서 300만 명이 넘는 병사가 사망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 전체 사망자 수가 약 1,700만 명이라고 하니 약 6분의 1에 해당하는 사망자가 서부 전선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죽음부터 훑던 카메라는 이내 독일군의 참호 속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포탄 소리에 놀라 몸을 덜덜 떨며 앉아있는 청년 하인리히가 상관에게 끌려 나옵니다. 상관의 “돌격!”이라는 고함에 하인리히는 총 한 자루를 쥐고 정신없이 뛰어갑니다. 이때 그의 옆으로 함께 달리던 동료들이 총알과 폭탄을 맞고 픽픽 쓰러집니다. 하인리히는 괴성을 지르며 프랑스군에게 달려들어 프랑스군의 심장을 손도끼로 찍어버립니다.
여기까지 마음 졸이며 하인리히를 따라갔던 관객은 이런 물음이 떠오를 겁니다. 과연 하인리히는 어리숙한 모습을 버리고 전쟁영웅으로 거듭났을까. 그는 살아서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갔을까. 그러나 카메라는 바로 다음 신에서 진흙과 핏물로 얼룩진 하인리히의 주검을 비춥니다.
버거 감독은 한 매체 인터뷰에서 “관객의 옷깃을 잡고 진흙탕으로 끌고 가 그곳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려 했다”고 밝혔습니다. 준비할 새도 없이 전쟁의 진창 속으로 관객을 끌고 간 카메라는 명예나 전쟁영웅과 같은 신화를 무참히 깨버립니다. 주인공인 줄 알았던 하인리히마저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보여주면서 말입니다.
더 무서운 건 전쟁이 끝나지 않는 한 제2의, 제3의 하인리히가 계속해서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독일군은 하인리히의 시체에서 군복을 벗겨내어 핏물을 빼고 세탁한 뒤 깔끔하게 다림질하고 다음 병사를 맞이합니다.
‘전쟁영웅·명예는 없다’ 참상을 목도하는 관객
하인리히가 입었던 군복의 새 주인공은 18살, 파울입니다. 파울은 작가 레마르크의 실제 이야기가 투영된 캐릭터입니다. 레마르크는 징집되어 전쟁터로 끌려갔지만, 파울은 “우유부단하거나 망설이는 건 조국에 대한 배신”이라 선동하는 선생님의 말에 휩쓸려 친구들과 자진 입대합니다.
전쟁을 새로운 모험으로 생각했던 파울과 친구들은 이내 현실을 알게 됩니다. 참호에서 벗어나면 바로 총알받이가 되고, 참호에 몸을 숨겼더라도 언제든 총알이 날아와 꽂힐 수 있다는 걸 말입니다. 장난기로 반짝였던 파울의 눈빛은 점점 생기를 잃어가고, 그의 영혼 역시 황폐해졌습니다.
“전쟁에는 영웅적인 것도 없고 위대한 것도 없다. 모든 죽음은 끔찍한 죽음이다.” 버거 감독이 집중한 것은 오직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거창한 대사보다도 죽음의 문턱에 선 인간들의 몸짓으로 기억됩니다. 파울의 막역한 친구 알베르토는 독일군 참호로 돌아오지 못하고 프랑스군에게 둘러싸이는데요. 무기를 버리고 손을 들어 항복을 선언하지만, 프랑스군 화염방사기에 불타 죽습니다. 1929년에 합의된 포로 대우에 관한 제네바 협약(제3조약)에 따르면 ‘무기를 버린 전투원’인 알베르토는 포로로 대우받아야 했지만 그 자리에서 바로 제거됩니다. 제네바 협약은 전쟁 중에도 지켜져야 하는 최소한의 인권에 대해 전 세계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 조약으로, 1864년부터 협의를 시작해 1949년에야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가 묘사하고 있는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아직 그 내용이 완성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알베르토의 죽음을 목도한 파울은 도망치던 중 구덩이에 빠집니다. 이때 프랑스 병사 한 명도 예기치 않은 폭발에 구덩이 안으로 굴러떨어지는데 파울은 살아남기 위해 프랑스군의 심장을 칼로 찌릅니다. 그가 소리를 지를까 두려워 죽어가는 이의 입에 진흙을 밀어 넣기까지 하는데요. 하나의 구덩이와 두 명의 병사. 숨결이 꺼져가는 한 사람과 무기를 휘두른 한 사람. 얼마 지나지 않아 파울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한 것인지 깨닫습니다. 머리를 감싸 쥐며 눈물, 콧물, 침을 흘려가며 울던 파울은 쓰러진 이의 곁으로 기어가 물을 먹이고 지혈을 시도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요컨대 이 구덩이는 지상에서 가장 슬픈 몸짓이 담긴 구덩이입니다. 인간적인 몸짓들로 채워진 이 장면은 길고도 집요하며 대사 한마디 없이도 지구상에 전쟁이 벌어져선 안 되는 이유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929년 레마르크가 소설을 출판할 당시, 그는 또다시 세계대전이 발발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비극은 2차 세계대전이라는 이름으로 반복되었고 현재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분쟁 등 세계 어딘가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쟁이란 그동안 인류가 수없이 그었던 전선이 아니라 영화 속 구덩이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곳에는 명예도 영웅도 없는 죽음의 심연만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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