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적십자사

지난 8월 16일, 대한적십자사를 이끌어갈 새로운 수장으로 신희영 서울대학교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가 선출되었습니다. 40년 넘게 의료인으로서 조혈모세포, 소아백혈병을 연구하고 더 나아가 한국백혈병어린이재단, 서울대학교 어린이병원학교를 설립하는 등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데 앞장선 신희영 회장을 만나 오늘날 봉사와 나눔의 의미, 적십자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들어보았습니다. 

Q. 대한적십자사 제30대 회장으로 취임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먼저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코로나19로 온 국민이 고통받는 이때 재난관리책임기관인 적십자의 중책을 맡게 되어 어깨가 아주 무겁습니다. 다행히 적십자가 걸어온 길과 의사로서 제가 해오던 일이 굉장히 닮아있기 때문에 현장에서 갈고 닦은 의료 경험과 능력을 총동원하여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데 앞장서겠습니다. 

Q. 회장님께서는 적십자와 함께하기 이전부터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앞장서 오셨습니다. 실제로 소아과 의사로 재직할 당시 가정형편이 어려운 소아암 환자들을 위해 백혈병어린이후원회(현 한국백혈병어린이재단)를 만들고, 직접 모금 활동도 하셨다고요? 

제가 서울대 어린이병원에서 근무한 1990년대만 해도 돈이 없어서 백혈병 치료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에 1991년, 백혈병어린이후원회를 설립하고 MBC와 함께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소아암은 치료할 수 있는 병이라는 걸 알리고, 후원하고 싶으나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모금 방법도 개발해냈죠. 마라톤 1m에 1원 모금, 동전 모으기, ARS 전화 1통화당 1,000원 기부, 레고 탑 쌓기 모두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 프로그램을 하면서 제작진과 함께 개발한 모금 방식입니다. 다행히 많은 국민이 취지를 이해하고 참여해주신 덕분에 소아암에 대한 인식이 많이 개선되었고, 이제는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치료를 못 받는 아이는 한 명도 없게 되었습니다. 

Q. 1996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서울대학교 어린이병원학교도 만드셨어요. 

어린이병원학교는 보호자가 식사하는 공간에 컴퓨터 몇 대 갖다 놓는 것에서 시작했습니다. IT 회사 직원들이 와서 컴퓨터 가르쳐주고, 디자인 회사 직원들이 미술 교육을 해주는 식이었죠. 당시만 해도 ‘병원학교’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왜 그런 걸 하느냐는 말도 많이 들었는데, 3년 정도 지나니까 반응이 굉장히 좋아졌어요. 덕분에 1999년, 정식으로 어린이병원학교가 문을 열었고 현재 전국 36개에 달하는 병원학교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Q. 어린이병원학교를 만들어서 아이들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신 건가요? 

우리 과 교수님께서 힘들게 치료한 백혈병 환자가 있었습니다. 근데 완치된 보람도 없이,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오랜 투병 생활로 인해 제때 공부도 못하고 사회성이 결여되는 등 한마디로 사회에 적응을 못 한 거죠. 그 일을 계기로 병을 이겨낸 아이들이 원래 있던 학교와 사회로 돌아가서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옛날에는 병원에 한두 달 입원하면 유급 처리되어 학교로 돌아가도 뒤처지기에 십상이었거든요. 지금은 각 과목을 전공한 자원봉사자들이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서 교육하고, 병원학교 수업을 출석으로 인정받아서 퇴원 후에도 자기 학년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학교랑 똑같이 가르치니까 백혈병이라는 말에 ‘나 죽나 보다’하고 입원했던 아이들도 ‘어? 나 살 수 있나 봐’라고 생각하며 치료를 더 열심히 받더라고요. 

Q. 40여 년간 의료인으로 근무하면서 기억에 남는 인연도, 보람을 느낀 순간도 참 많았을 것 같습니다. 

어린이병원학교에서 공부한 학생 중에 수능 만점을 받아서 서울의대에 수석 합격한 친구도 있고, 청와대 행정관이 되어 어릴 적 꿈을 이룬 친구도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성공한 친구들도 기억에 남지만, 치료했던 환자들이 잘 성장해서 찾아와주면 그걸로 그냥 좋아요. 오늘도 편지를 한 장 받았는데 영국 에든버러 대학의 목사가 됐다고 소식을 알려주는 편지였어요. 이런 편지 한 장, 찾아오는 한 명이 저의 자부심이자 보람이죠. 1988년, 보육원에서 만났던 아이들도 기억에 남습니다. 200명쯤 되는 아이들이 전부 옴에 걸려서 피부가 말이 아니더라고요. 간호사, 행정직원, 약사, 운전기사, 그리고 저까지 한 팀이 되어서 봉고차를 타고 2주에 한 번씩 진료를 나갔는데, 꼬박 2년이 걸렸어요. 아이들을 다 치료하기까지…. 그래도 마지막에 애들 피부가 깨끗해진 거 보니까 정말 뿌듯하고 좋았습니다. 

Q. 대학병원의 의사로 본업에 충실하기도 바쁘셨을 텐데, 이토록 많은 봉사활동을 한 이유는 뭔가요? 

할 수 있으니까요. 간혹 저보고 봉사정신이 투철하다 고 말씀하는 분도 계시는데, 그렇지 않아요. 내가 가진 능력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니까 당연하게 하는 거죠. 모든 사람에겐 저마다의 능력과 재능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의술이었을 뿐…. ‘시간이 없어서, 가진 게 없어서’라며 안되는 이유를 찾기보다는 봉사할 수 있는 이유를 찾는다면 우리 사회가 더 너그럽고 따뜻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Q. 이러한 회장님의 발자취와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는 적십자의 사명은 많이 닮아있는 것 같습니다. 대한적십자사의 새로운 수장이 된 지금, 회장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적십자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사람들이 나눔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방법을 모르거나 직접 할 수 없을 때 ‘믿고 맡길 수 있는 기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조건 투명해야 해요. 모금기관의 특성상 돈이 들어오고 나가기 때문에 항상 경계하고, 사용 내역을 정확하게 공개해야 하죠. 대한적십자사는 이미 국내 비영리기관 최초로 국제회계기준(IFRS)을 도입하고 예·결산 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습니다. 이번 코로나 극복 성금으로 모인 830억 원의 사용 내역도 주기적으로 홈페이지에 공개하는 등 모금기관으로서 신뢰성을 확보했 잖아요. 이러한 부분을 더욱 발전시키고 널리 알려서, 나눔문화 확산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Q. 각종 재난과 새로운 감염병이 출현하는 오늘날, 보건의료 및 재난관리책임기관의 역할도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운영 방안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예측 불가능하고 복합적인 재난이 발생하는 지금, 재난 대응에서 가장 중요한 건 ‘타이밍’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 당장 잘 곳을 마련하고 음식을 제공하는 것처럼요. 그런 점에서 전국 15개 지사의 현장 대응능력은 최고이기에 그때그때 필요한 재원을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공급하는 등 전폭적으로 지지할 겁니다. 더 나아가 정부와 긴밀하게 협력하고 기민하게 대처하여 우리 사회의 재난복원력을 높이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겠습니다. 새로운 질병과 감염병에 대응하기 위한 적십자의 보건의료사업 역시 중요합니다. 적십자병원의 기능을 강화하고 규모를 확대하여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에서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고 안전을 도모해야 합니다. 이 모든 걸 제 임기 안에 할 수는 없지만, 지금부터 계획을 세우고 추진한다면 10년 뒤에는 적십자병원이 공공의료의 성공적인 운영모델로 거듭날 수 있을 겁니다.  

Q. 회장님께서는 대한수혈학회 이사회장, 대한소아혈액종양학회 부회장, 대한조혈모세포이식학회 이사장, 한국조혈모세포은행협회 회장 등을 역임한 혈액 관련 전문가로 국내 혈액공급을 책임지는 적십자의 수장으로 적격이라는 평가가 많았습니다. 혈액 사업에 대한 계획은 없으신가요?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혈액만큼은 인공적으로 만들 수 없어요. 그래서 혈액이 귀하고, 헌혈은 숭고한 겁니다. 국내 혈액전문기관인 대한적십자사는 국민 여러분의 소중한 혈액을 안전하게 공급할 책임이 있어요. 이러한 책임을 무겁게 받아, 정부가 준비 중인 ‘국가 혈액 관리 기본계획’을 적극적으로 실행하고 2025년까지 국민헌혈률 6% 를 달성하겠습니다. 아울러 의사의 입장에서 보고 느낀 것을 바탕으로 혈액을 더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방법을 연구하고 대한적십자사와 학계, 그리고 병원을 연결하는 역할을 해나가겠습니다.  

Q. 취임사를 통해 ‘한반도의 건강공동체’를 언급하신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적십자와 함께 만들어나갈 남과 북, 그리고 한반도는 어떤 모습일까요? 

저는 남북관계에 통합적으로 접근하여 평화를 위한 기초 환경을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남북 보건의료 협력도 그중 하나예요. 2,500만 명의 북한 인구가 건강하지 않으면 평화도, 통일도 힘들거든요. 지금부터 공동연구개발과 같은 다각적인 협력을 통해 북한의 보건의료 환경을 끌어올리는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나아가 답보상태에 놓인 이산가족 문제도 해결하기 위해 상봉은 물론, 화상통화, 고향 방문 등 다양한 방식을 모색해나가야죠. 

Q. 이 같은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재원확보가 필수이지만, 경기침체, 개인화 등으로 기부 심리는 나날이 위축되고 있습니다. 이를 타개할 방법으로는 뭐가 있을까요? 

재난구호, 취약계층지원 등을 위한 적십자의 대표적인 활동 재원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자발적 기부금인 적십자회비가 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기존의 지로 모금 방식에도 변화가 필요 합니다. 적십자는 정부의 새로운 정책인 페이퍼 리스, 모바일 전자고지 등에 맞추어 2020년, 모바일 전자고지 서비스를 시범 운영하고, 2023년부터는 대국민 적십자 회원 캠페인과 모바일 적십자회비 모금을 전개할 예정입니다. 더 나아가 다양한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기업과 정부, 타 NGO와 협력하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과 사회적 가치 실현을 위한 기부금 모집을 확대하겠습니다. 매년 경기침체로 모금 활동에 어려움이 많다는 이야기가 들리지만, 저는 이번 코로나19 극복 성금으로 830억 원이 모금된 것을 보며 우리 사회는 아직 따뜻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적십자가 변화를 두려워 하지 않고, 지금과 같이 나눔문화 확산에 앞장선다면 분명 많은 분께서 적십자의 뜻에 동참해주시리라 믿습니다. 

Q. 지금까지 회장님의 귀한 말씀 잘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후원자, 봉사자, 직원 등 적십자를 응원하는 분들에게 한 말씀 부 탁드립니다. 

앞으로 적십자는 시대의 요구에 따라 많은 변화를 맞이할 것입니다. 하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분명 국민을 감동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까지 적십자와 함께 나눔을 실천해주신 후원자와 봉사자 여러분들도 멈추지 말고, 지속적으로 적십자가 나아가는 그 길에 함께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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