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내전의 실종자를 기억하는 일

내전의 아픔을 묻기로 하다

1936년 스페인 내전 발발 당시 스페인은 민주국가였습니다. 투표에서 좌파 진영인 인민전선이 승리하자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유럽 최연소 장군’이란 타이틀을 가진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그 주모자였죠.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도움을 받은 반란군들은 같은 민족을 상대로 그야말로 잔인한 살육을 벌였습니다. 투우장에 수천 명의 사람을 몰아넣고 기관총으로 쏴 죽인 ‘바다호스 학살’ 사건을 일으켰고, 여성을 향한 강간을 일삼았으며, 여성들에게 설사약을 먹여 거리를 행진하게 만드는 비인간적인 일도 벌였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적십자 구급차 운전사로 일했던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저널리스트가 되어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전했고,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써서 스페인의 비극을 다시 한번 알렸습니다. 스페인 내전으로 발생한 실종자수만 해도 11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영화 <패러렐 마더스> 속 주인공인 야니스(페넬로페 크루즈)의 증조부도 스페인 내전 당시 실종되었습니다. 내전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인 야니스는 증조부 이야기를 할머니에게 들었고, 고향 땅에 묻힌 증조부를 비롯한 실종자들의 유해를 어떻게 발굴할 수 있을지 늘 고심해왔던것 같습니다. 사진작가인 야니스는 그래서 인터뷰 촬영 때 만난 법의학자 아르투로(이스라엘 엘레할데)에게 증조부와 실종자들의 유골을 어떻게 발굴할 수 있을지 자문을 구하죠.

<패러렐 마더스>는 그러나 곧장 유해 발굴 과정을 비추지 않습니다. 멜로드라마와 블랙코미디에 능한 알모도바르 감독은 자신의 장기가 묻어나는 우회로를 택하죠. 야니스는 그가 도움을 청한 아르투로와 사랑에 빠지고 새 생명을 갖게 되는데, 출산 과정에서 병원의 실수로 야니스의 아이와 또 다른 산모 아나(밀레나 스밋)의 아이가 바뀌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를 모르는 야니스는 사랑을 듬뿍 주며 아이를 키웁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아이의 외모가 자신이나 아르투로와 닮지 않았다는 걸 느끼고 병원의 실수를 알아차리게 됩니다.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아빠와 아나에게 전화를 건 야니스는 이들과 연락이 닿지 않자 순간적으로 어떤 결단을 내립니다. 진실을 묻고 바뀐 아이를 자신의 핏줄처럼 키우기로. 이미 벌어진 사건에 대해 입을 열지 않고 비밀로 남기기로. 아이가 바뀐 이야기와 스페인 내전 사이의 연관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스페인 사회는 내전의 아픔을 묻기로 하고 ‘가족만의 문제’로 남겼기 때문입니다.

2022년, 실종자 발굴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한 스페인

1939년 치열했던 스페인 내전은 드디어 막을 내립니다. 민주국가 스페인은 프랑코의 독재 국가가 되었고, 독재자는 35년 넘게 집권한 뒤 치매 증상을 보이다 1975년 사망했습니다. 동시대의 독재자인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보다도 오랫동안 집권했기 때문에 프랑코가 살아있는 동안 스페인인들의 가슴에 응어리진 아픔은 제대로 회복될 수 없었습니다. 희생자를 기리는 제대로 된 기념물도 없는 게 현실이었죠. 문제는 프랑코가 사망한 뒤에도 스페인 사회는 전쟁의 상처를 묻기로 결정한 것이었습니다. 아이가 바뀌었다는 걸 알아차린 야니스가 진실을 감춘 것처럼 말이죠. 1977년 스페인 의회는 사면법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망각의 합의’라고 불리었습니다.

30년이 더 흐른 2007년에야 희생자의 유해를 수습하고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기억법’이 제정되었는데 이마저도 예산 부족 등을 이유로 유명무실했죠. 그러는 사이 시간은 부지런히 흘러 스페인 사회는 희생자의 2세들도 세상을 떠나가는 2020년대를 맞게 됩니다. <패러렐 마더스>는 정확히 이 시기에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극 중 증조부의 유해를 수습하고자 하는 야니스는 실종자의 2세도, 3세도 아닌 4세입니다. 실종자 문제는 단순히 실종자 가족들의 하루하루를 피 말리게 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 또 그다음 세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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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찬란

무력충돌 시 중대하게 다뤄져야 할 실종자 문제

국제적십자위원회 정의에 따르면 실종자란 무력충돌의 결과 행방불명된 자를 일컫습니다. 교사였던 야니스의 증조부처럼 민간인이든, 무력충돌에 가담한 군인이든 생사나 행방과 관련한 정보가 없으면 실종자로 분류됩니다. 적십자위원회가 초안 작성에 참여한 ‘강제실종으로부터 모든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국제협약’은 2006년 12월에서야 UN총회에서 채택되었기 때문에 그전에 벌어진 스페인 내전 때는 실종자에 대한 의식이 높지 않았으리라 예상됩니다. 지금의 국제인도법과 인권법은 실종자 가족들이 실종자의 생사에 대한 알 권리를 중요시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무력충돌 당사자 양측 모두 사무국을 설치해 포로나 사망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유해를 송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스페인 내전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죠. 영화 속에서 진실을 묻기로 한 야니스는 자신의 선택을 고수했을까요. 기른 아이를 향한 사랑과 애틋함에도 불구하고 야니스는 과거에 벌어진 일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곧 깨닫습니다. 할머니에게 증조부의 유골을 꼭 찾아내 묻어드리겠다고 약속한 것처럼 아이를 친모에게 돌려주고 과거를 똑바로 정립하려고 하죠. 눈물로 아이를 떠나보낸 야니스는 때때로 아나와 그의 아이와 만나며 연을 이어가는 현명한 선택을 내립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르투로의 도움으로 증조부와 마을 주민들이 묻힌 땅을 조심스럽게 파내죠. <패러렐 마더스>는 야니스와 고향 주민들이 앙상해진 조상들의 유골을 발견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립니다. 그리고 영화가 공개된 이후인 2022년 10월, 스페인 의회는 기존의 법을 보완한 ‘민주주의 기억법’을 통과시키고 희생자 DNA 은행도 설립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전쟁을 떠올릴 때, 이른바 ‘숨겨진 비극’인 실종자 문제를 간과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실종자는 매우 중요한 문제로, 무력충돌이 벌어진 바로 그 순간부터 중대하게 다뤄져야 합니다. 무력충돌이 끝난 이후에도 실종자에 대한 정보는 투명하게 관리되어야 하죠. 영화 <패러렐 마더스>는 실종자 문제를 놓쳤을 때 그 사회는 더 큰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억은 흐려지기 마련이지만, 어떤 기억은 아프게 남아 세대를 넘어 전해지곤 합니다. 스페인 내전은 지울 수 없는 종류의 기억이었던 것 같습니다. 약 90년이 흘렀으나, 사회는 이를 잊지 않았고 이제 막 내전으로 실종된 사람들을 발굴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늦었지만 하루빨리 실종자들의 유골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길 멀리서나마 바라봅니다. 전쟁과 학살로 스러져간 이들이 부디 평온한 안식에 들 수 있길 함께 기도합니다.